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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청춘이다-워싱턴] 시니어센터 백발의 만학도들, "신념과 열정으로…배움에 나이는 숫자일 뿐"

“어떤 사람은 젊고도 늙었고, 어떤 사람은 늙어도 젊다.” 유태인들의 지혜의 보고인 탈무드에 나오는 말이다. 청춘을 판단하는 기준이 물리적 혹은 육체적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가짐과 행동에 있다는 의미다. 워싱턴 일원에서도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자세로 만학의 발판을 마련해주는 곳들이 있다. 백발이 성성한 60~90대 노인들의 배움터인 시니어 센터다. 이 지역에서 운영되고 있는 시니어센터는 중앙시니어센터, 메릴랜드 상록대학, 벧엘 시니어 아카데미, 열린문 평생교육 교실, 메시아 평생교육원 등 10여 개를 훌쩍 넘는다. 각 교회나 노인회, 단체 등이 운영 중인 다소 규모가 작은 배움터까지 합치면 그 수는 훨씬 늘어난다. 또한 워싱턴 일원 한인 노인 인구가 증가세를 보이면서 앞으로 시니어센터를 개설하려는 교회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지난 가을학기에 문을 연 메릴랜드 하노버의 빌립보 평생교육원도 그 중 하나. 이 평생교육원은 남녀노소 제한 없이 개방된 곳이지만 학생층은 단연 만학도들이 앞선다. 대부분 55세 이상을 대상으로 하는 시니어센터의 교육 내용이 그저 시간 때우기 식 소일거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편견이다. 이들 기관들은 라인 및 워십 댄스, 노래, 종이 접기, 뜨개질 등 취미 활동은 기본, 영어, 스페인어, 시사, 동양화, 문예창작, 컴퓨터, 시민권 시험준비, 포토샵, 사진, 영양관리 등 세분화된 다양한 학습 과목을 두고 있다. 배우고자 하는 신념과 열정이 넘치는 이 곳이야 말로 ‘불로장생’, 영원한 청춘의 도가니다. 노인들의 학구열 뜨거워 취미부터 컴퓨터·포토샵 과목도 점점 세분화 돼 젊은이 못지 않은 춤솜씨 나눔실천 위한 사회봉사 다른 노인들 위로하기도 ◇청춘을 압도하는 만학도의 학구열= 나이가 들어서도 배움의 삶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워싱턴 일원 만학도들의 의지는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철학자 스피노자의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지난해 12월 각 시니어센터에서 열린 가을학기 종강식은 이를 증명하는 장이었다. 워싱터 한인복지센터(이사장 해롤드 변)시니어 아카데미에서는 15주간 갈고 닦은 학생들의 '학예회'가 펼쳐져 보는 이들을 뿌듯하게 했다. 젊은이들 못지 않은 몸짓으로 춤 실력을 과시하는 70, 80대 어르신들부터 유창한 발음으로 팝송을 선사하는 60대의 ‘어린’ 학생들도 있었다. 메릴랜드 상록회(회장 박희규) 산하 상록대학 종강식에서도 300여명의 학생들은 그 동안 배운 솜씨를 유감없이 선보였다. 시니어센터 관계자들은 “배울 기회를 놓치거나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어르신들에게 학문의 길을 터주는 것은 보람된 일”이라면서 “적극적으로 배우려는 자세 는 두뇌활동을 도와 기억력 감퇴나 치매예방에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등 생활의 활력소가 된다”고 입을 모았다. 고령일 수록 배움의 속도는 느리지만 반복을 통해 습득할 수 있고, 취향과 관심도에 맞는 것을 배울 때 효과는 배가 된다고 덧붙였다. 일례로 중앙시니어센터 문예반 학생들이 몇 해 전 시집을 펴내면서 한인 사회를 깜짝 놀래 켰었다. 당시 시인의 꿈을 이룬 11명의 학생들은 평균 70대가 넘은 늦깎이 문학도들이었다. 그 이후로도 문예반의 창작 열기는 수필과 소설 등 장르를 넘다 들며 여전 히 뜨겁다. 지난해 12월 한 시니어센터의 가을학기 종강식에 참석해 70, 80대의 후배들을 격려한 송양림 할머니도 만학도의 산 증인. 1916년생인 송 할머니는 올해로 96세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시민권 준비반, 영어반 등에서 수학하며 10년 개근상을 받는 등 모범생의 위력을 과시했다. ◇배움 이루며 나눔과 봉사까지= 워싱턴의 만학도들이 배움만큼이나 열정을 쏟는 부문은 나눔 실천을 위한 사회 봉사다. 지난 여름 중앙시니어센터의 이혜성 디렉터는 미국 노인들의 자원봉사를 권장하기 위한 백악관 초청 행사에 한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초청되기도 해 화제가 됐다. 이 행사에서 그는 페어팩스 카운티의 지원을 받아 운영해온 한인 노인 식사배달 프로그램에 대해 소개했다. 지난해 12월 열린 종강식에서도 이 시니어센터는 90세 전후의 어르신들을 위한 효도잔치를 마련하기도 했다. 하워드 카운티 한인 노인회는 지난해 10월 카운티 노인국에 아름다운 기부를 해 훈훈함을 더했다. 어르신들이 고이 간직해 온 장신구와 옷가지, 귀금속 등 2000여 점의 물품을 선뜻 바자회에 내놓고 그 수익금 약 3600달러를 모았다. 이 수익금은 응급상황에 처한 카운티 내 노인들에게 약품이나 전기세, 개스비 등을 무료로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인 비비안 리드 펀드에 사용됐다. 노인국의 문성희 이중언어담당관은 “소수계 중에서는 한인 커뮤니티가 유일하게 노인응급 구호기금인 비비안 리드 펀드에 관심과 열정을 보내주고 있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시니어센터 학생들은 직접 양로원을 찾아 다니며 함께 인생의 황혼기를 보내고 있는 노인들을 위로하기도 한다. 워싱턴 한인복지센터의 시니어 아카데미 학생들은 지난해 연말 애난데일의 리우드 너싱홈을 방문해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과 연말연시의 정을 나눴다. ◇직접 찾아가는 시니어센터= 마음은 청춘이지만 몸이 안 따라줘 답답한 노인들을 위한 ‘움직이는’교육 현장이 있어 눈길을 끈다. 미주한인노인봉사회(회장 윤희균) 회원들은 매주 월요일 오후 5시 30분 버크 노인아파트를 찾아가 에어로빅과 요가 수업을 실시한다. 총 150여명의 거주자 중 절반 이상이 한인 노인들이다. 자신 역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지만 노인들을 위한 봉사활동에 앞장서 온 윤희균 회장은 “아파트 청소 봉사를 하던 중 몸이 불편해 시니어센터에 가지 못한다는 할머니들의 사연을 듣고 움직이는 배움터를 만들기로 했다”고 취지를 밝혔다. 에어로빅 강사인 조미경 씨는 “어르신들이 천천히라도 몸을 움직이면 당연 건강에도 좋지만 무료한 일상에 즐거움을 더할 수 있다”며 “이제는 한인뿐 아니라 인도, 필리핀 등 타민족 어르신들도 참여하실 정도로 인기가 높아졌다”고 말했다. 이성은 기자

2012-01-03

[나는 청춘이다] '희망 전도사' 내과 전문의 이준남박사

100세인 클럽 활성화 앞장 "희망 가져야 건강도 지킨다" "당신이 진정으로 살기를 원한다면, 지금 당장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을 준비를 하라." 지난달 24일 애틀랜타 외곽 둘루스에 있는 중앙일보 사옥 강당. 희끗희끗한 머리의 노신사가 영국 옥스퍼드대 출신 '위스턴 오덴'의 시를 인용하면서 희망과 행복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그는 참석자들을 향해 "인생은 걱정의 연속이다. 살아있는 동안 절망도 경험하고 희망도 품으면서 사는것 아니겠냐"면서 당당하게 말했다. 이 주인공은 내과의사 이준남(69) 박사다. 그는 2011년 2월부터 격월로 24회에 걸쳐 '건강하게 삽시다'를 주제로 건강교실 강좌를 열고 있으며, 100세까지 무병 장수하자는 취지의 '100세인 클럽'을 운영해 왔다. 이준남 박사는 애틀랜타 지역 한인 노인들의 '희망 전도사'다. 그는 노인들을 이해시키고, 동기를 부여한다. 동기를 부여하는 도구는 자신의 특기인 '건강'이 매개체다. 올해 그는 노인들과 지역 한인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주제의 건강강좌를 진행해 왔다. 낙상, 골절, 어지럼증 예방에서부터, 영양 보충제 확실히 알고 정확하게 복용하기, 건강한 음식생활, 뇌졸증, 외로움이 건강 미치는 영향, 100세인들의 생활습성 등 여타 강좌와는 조금 다른 실생활에서 피부로 와닿는 주제들이 대다수다. 그는 "미주 한인들의 언어는 '돈'과 '구원'으로 통용된다. 희망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면서 "미주 한인들의 건강상태는 한국에 거주하는 국민들보다 좋지 않다는게 평균적인 의견이다. 이는 희망의 부재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런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이 박사는 둘루스 아씨 플라자내 회의실에서 매주 20여명의 노인들과 함께 '건강한 삶'을 주제로 머리를 맏댄다. 바로 100세인 클럽이 그것이다. 지난 2009년 10월 발족한 이 단체는 매주 다른 주제를 놓고 어떻게 하면 건강하고, 생산성을 유지하면서 의미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지를 토론하고, 실천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최근 모임에서는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는 인생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죠. 이를테면 운전 중에 갑자기 차가 끼어들면 욕을 하는 대신 '무언가 바쁜가 보다'라고 생각한 뒤 조용히 양보를 한다는 식으로 마인드를 바꾸는 겁니다." 그는 "과학적으로도 부정적인 생각이 앞서가면 면역력이 떨어진다는 사실이 검증됐다. 긍정적인 마음이 희망을 만들어낸다"고 덧붙였다. 이준남 박사는 1966년 서울대 의대 졸업 후 1971년 도미해 에모리 의과대학 크로포드 롱 병원에서 내과 인턴과 레지던트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976년부터 40년 이상을 내과의사로 일했다. 미국 '전인치유학회' 회원이면서 '21세기 전인치유사역', '알고자는 잠', '당신은 인생 후반기의 계획을 갖고 계십니까' 등 수십권의 저서를 냈다. 이 박사는 "의사 생활을 하다보니 누구는 일찍 죽고, 누구는 100세까지 사는게 신기했는데 점차 약을 먹지 않고도 병을 고치고, 예방도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연구하고 책을 쓰기 시작한 것이 벌써 20여년째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병을 스스로 고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그는 믿는다. 또 "음식, 운동, 잠의 패턴 등 장수할 수 있는 비결이 따로 있다"고 강조한다. 그에게 있어 ‘100세인 클럽’은 그간 연구해 온 자연치료법을 실천하고, 모두가 100세까지 장수하는 길을 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담당한다. 그는 특별히 노인들이 희망을 갖기 위해 세가지 삶의 패턴을 갖자고 제안한다. 첫번째는 노인들의 '정체성 확립'이요, 두번째는 '기쁨과 감사', 세번째는 '염증을 내리는 삶'이다. 정체성을 확립하고, 인생에 대해 기쁨과 감사를 갖고, 염증을 줄여가면서 사는것이 희망을 갖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 박사는 인생이 늘어난 것이 아니라, 30년을 공짜로 얻은 것"이라며 "태어난 것 자체가 선물이고, 힘든일이 벌어져도 놀라움 그 자체가 인생이라는 선물의 반증"이라고 강조했다. "노인들이라고 돈만 있고 편하게 죽겠다는 소리를 하는걸 보면, 참 답답합니다. 오히려 더 많은 갈등 속으로 부대껴도 보고 걱정하고, 절망도 맞보세요. 절망한다는 것은 희망이 있다는 증거 아닙니까" 끊임없이 100세인을 현실로 만드는 희망을 갖고있는 이준남 박사의 눈은 여전히 꿈꾸는 소년과도 같았다. 권순우 기자

2012-01-01

[나는 청춘이다] 75세 이상현씨

10년 전부터 연장자들 촬영 자녀들에 사진 보내기 도와 사고로 10년간 지팡이 신세 출사 다니다 다리 완쾌 돼 한인사회 모든 행사 현장 누벼 하루 3마일 이상 걷기는 기본 워싱턴 메트로 지역 한인사회에서는 ‘카메라 아저씨’가 어느 K-POP 스타 보다도 유명하다. 어느 장소, 어느 행사에 가도 한인들은 카메라 아저씨를 만날 수 있다. 사람들은 이렇게 이상현씨를 아저씨라고 부르지만 그는 이미 12살 짜리 손녀와 9살 손자를 두고 환갑은 애저녁에 넘은 할아버지다. 1936년생이니 75세가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야말로 산천을 누비고 다닌다. 그가 가는 곳에서는 언제나 ‘작품’ 사진이 나온다. 그의 재산목록 1호인 니콘 카메라와 각종 렌즈는 어느 사진작가 보다도 더 진솔한 우리네 모습과 아름다운 풍광이 담긴다. 그가 이처럼 카메라를 들고 다닌지는 이미 10년이 넘는다. 그렇다 보니 그는 이미 실전에서 어느 카메라 전문가들 보다 더 정교하고 훌륭한 사진을 만들어낸다. 이상현 옹이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시쳇말로 요즘 좋은 카메라를 들고 폼내기 위해 시작한 것이 아니다. 그는 중앙장로교회 시니어 센터를 줄곳 다니면서 연장자들과 생활하다 보니 그들이 먼 미국땅에 와 살면서 늘 자식을 그리며 생활하면서도 자녀들에 자기 사진을 보내지 못해 안스러워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말도 안통하는데다 누구에게 부탁할 사람도 마땅치 않기 때문에 언제 작별할 지 모르는 자녀들에게 사진 안부를 보내려 해도 잘 못하고 있는 것이다. 보다못한 그는 우연히 갖게된 소형 ‘똑딱이’ 카메라를 이용해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사진을 찍어 한국이나 타지에 사는 자녀들에게 보내주도록 했다. 결과는 의외로 호평. 사진을 보낼 수 있게된 수많은 이들은 이상현씨에 감사의 말을 전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종종 벌어졌다. 그 역시 삶이 순탄치 않았던 탓에 어려운 상황에서 작은 일이 이처럼 큰 보람을 가져다주는 것을 체험한 그는 사람사이에 정을 느끼기 시작했고, 이후로도 계속 카메라를 들고다니며 필요한 이들에 사진이라는 선물을 했다. 순탄치 않은 삶은 그가 행동하는데에서 이미 사람들이 알아챌 수 있다. 그는 정상적인 걸음걸이가 안된다. 쉽게 말해 다리를 전다. 심한 소아마비도 아니면서 그는 한 다리를 절며 다닌다. 지난 1980년 10월.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교통사고 때문이다. 36세에 육군 공병대에서 제대한 뒤 미국에 와 3년여 고생하면서 어렵사리 2베드룸 타운홈 집도 장만하고 이제 막 자동차 정비소 사업장을 시작하려 할 때 사고를 당한 것이다. 술에 취한 미국인 운전자가 그의 차를 강하게 들이받으면서 그는 왼쪽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 다친 정도가 아니라 무려 27군데 골절상을 입는 큰 부상이었고, 경우에 따라서 다리를 절단해야 했으나 천만다행이도 신경줄과 근육은 끊어지지 않아 극단적인 절단 상황은 피했다. 그러나 그의 다리에는 아직도 수십개의 보철과 교정금속이 박혀있으며, 그는 이처럼 걸음걸이가 편치 않은 것이다. 그가 교통사고 이후 다시 걸을 수 있게 된 것은 사고 이후 무려 10년만이다. 다행히 사고 전 얼마간 벌어놓은 돈으로 각박하나마 부인이 허드렛일을 하면서 삶은 이어왔으나 사고 후유증은 오래가 생활도 어려웠다. 손재주와 수리기술 등이 천부적이던 그는 지팡이를 집으며 어렵게 걸으면서도 주변의 도움으로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근근히 일을 할 수 있었고, 그 자신도 일어서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한 의지에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걷고 또 걸었다. 그는 신실한 종교심과 천부적인 인내심을 무기로 무한걸음을 이어오다 마침내 사고가 난지 10년만에 지팡이 없이도 걷게 됐다. 그는 이 때 “움직이는 것이 나를 걷게 했다”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 이상현 옹은 “사진 찍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면서 “만족스런 사진을 찍기 위해서 나는 하루에 3마일 이상을 걷는다”고 말한다. 그는 “내가 걷지 않으면 아마도 약값이 많이 들어갈 것인데, 약을 사서 먹는 비용보다 사진찍으면서 다니는 비용이 더 적게 든다”며 어느 장소든 가리지 않고 오늘도 다닌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지금도 다른 사람들처럼 약봉지를 들고다니거나 건강보조제를 먹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처음에 낯선 사람이 사진을 찍는 것에 불쾌하게 여기기도 했다”면서 그러나 “카메라 렌즈가 잘 보이게 만들어주니 예쁘게 웃으세요”라며 부드럽게 다가서고, 이후 찍은 사진을 이메일로 보내주고 나면 언제나 100% 고맙다는 답장을 받는다고 자랑한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 워싱턴 방문시에도 대통령에 질문하는 이들을 일일히 찍어 사진을 기념하라며 보내줬다. 물론 그는 경호실 직원이 옷소매를 잡아 끌며 완력으로 그를 저지했음에도 “제발 놔주세요. 난 찍어야 합니다”고 나즉이 말하자 결국 허용했었다. 아무도 찍어주지 않은 대통령에 대한 질문장면의 사진을 받아든 이들은 이상현씨에 가보로 전해줄 보물을 선물받았다며 고마와했다. 그는 오늘도 한인사회 모든 행사장을 누빈다. 그에게 주어진 각종 협회의 홍보이사, 홍보담당자란 직함은 오히려 거추장스럽다. 그에게는 사진이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한 원동력이며, 오늘을 사는 버팀목이다. 걸으면서 얻은 것은 건강과 사람들의 추억과 지금의 최고의 순간을 담은 사진들이다. 그에게 그 3가지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생을 사는 보람이 되기에 충분하다. 훌륭한 작품전이라는 돈 들이는 행사를 하지 않아도 그의 사진은 어느 작가 못지않게 많이 뿌려져 있다. 그것도 그의 사진을 가진이들이 사치품으로 가진 것이 아니라 어떤 재산보다도 아끼는 보물인 것이다. 그는 오늘도 저수지를 걸어 흰머리 독수리를 찍으러 저수지를 걷고 있었다. 인생 반 이상을 살아 이제 익숙해진 미국 땅에서 미국을 다시 찾는데 독수리가 가장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오늘도 그는 아마 4마일은 걸은 것같다. 그에게 청준은 바로 자기를 찾아 사진으로 담으려는 애착에 다른 말이다. 최철호 선임기자

2012-01-01

[나는 청춘이다] 그 떨리는 푸르름…2012년 희망 안고 뛴다

전세계가 몇 년째 어렵다. 젊은이들은 젊은이들대로 왜 하필 내가 젊을 때 불황인가. 한창 아이들이 커서 돈이 많이 필요한 장년들도 왜 지금인가. 은퇴를 앞둔 중년들도 그동안 잘나가다가 왜 내가 은퇴할 즈음에 이런 걸까 하는 안타까움과 억울함이 깔려 있다. 지금은 누구에게나 경제는 어렵고 미래는 불투명하다. 그런데 이런 어려움을 파릇파릇한 청춘의 정신으로 헤쳐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모두 육체적으로 젊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50대도 있고 심지어는 90대도 청춘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인생의 청춘들에게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청춘들은 누구나 고민이 있다. 이들의 고민은 단순한 걱정이 아니다.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한 판단과 결단이 필요해서 생겨나는, 진지한 고민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희망이 있는 청춘은 나이에 상관없이 역사를 이끌어 가는 주도자들일 수 밖에 없고 다른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면모를 갖고 있을 수 밖에 없다. 꿈틀거리는 생명력,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내 손에 흙을 묻히는 도전 정신, 홀로 서려는 자립심, 달려드는 모험심을 갖고 있는 이들이다. 2012년 임진년의 첫 날을 맞아 청춘들의 이야기를 통해 청춘 같이 올 한해를 살아갈 내 안에 잠자고 있는 청춘을 빨리 일깨워 보고자 한다. 인생을 낭비하기에는 내 삶의 모래시계에 들어 있는 시간이 너무 없다. 힘들고, 고민하지만 굳건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청춘, 그 얼마나 떨리는 푸르름인가. 장병희 기자

2012-01-01

[나는 청춘이다] '남가주 사랑의 교회' 청년부 리더 이야기를 듣다

천수범 대학원생 직장·사랑·경제적 어려움… 젊은 시절 겪는 삶의 일부 김석준 영화편집 만나는 사람·그룹 많아도 내면의 깊이 추구는 적어 김찬석 세무사 대부분 '비전'에 대해 고민 요즘 청년 인생 '불안정' ‘청년 위기(Quarter life crisis)’란 말이 있다. 요즘 10%를 넘나드는 높은 실업률과 불안한 경제상황 등은 청년들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만든다. 가장 생기 있게 살아가야 할 청년들에게는 이러한 현실 자체가 큰 도전이다. 애너하임 지역 남가주 사랑의 교회 청년부는 미주에서 한인 청년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주 500여 명의 20대~30대 청년들이 한자리에 모이고 있다. 그곳을 들여다 보면 청년들의 고민과 현실이 보인다. 지난 20일 남가주 사랑의 교회 청년부 리더들을 만나 생생한 '청춘' 이야기를 들어봤다. 천수범(34·대학원), 김찬석(32·세무사), 김석준(31·영화편집) 씨는 각각 소그룹 리더를 맡은 지 5년이 넘는 '베테랑'이다. 이들은 가장 가까이서 청년들과 함께 호흡한다. 청년들이 말하는 ‘청춘’은 무엇일까. 그들은 "부딪히는 현실과 고민을 돌파하는 힘"이라고 정의했다. - 얼마 전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이 유행했다. 책 제목…공감하나. ▶천수범= 소그룹에서 보면 대부분의 청년이 현실 속에서 각기 다른 어려움을 겪는다. 직장이나 사랑, 경제적인 문제 등 삶에서 부딪히는 실제적인 문제들 말이다. 당연히 좌절하거나 아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다이내믹한 삶을 겪는다는 게 ‘청춘’ 아니겠는가. ▶김석준= 아프다는 것은 꿈을 꾸고 뭔가 기대했기 때문이다. 기대와 희망이 없었다면 아플 것도 없지 않나. ‘청춘’은 그 가운데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 청년들의 가장 큰 고민이 무엇이라 생각하나. ▶김찬석= 지난 5년간 리더를 맡으면서 소그룹을 통해 만난 청년들만 100여 명이 족히 넘는다. 대부분 ‘비전’에 대해 고민한다. 매주 기도제목을 보면 안다. 단지 ‘뭘 먹고 살아야 하지?’라는 문제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정말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는 청년들이 많다. 삶을 개척해 나가는 청년 세대이기에 가능한 고민 아닐까. ▶천수범= ‘배우자’ 문제도 중요한 이슈다. 좋게 말하면 청년시기에 누릴 수 있는 ‘가슴설레는 고민’인데… 반면 이는 '골치 아픈 고민'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혼자 인생길을 걷다가 평생 함께 걸어갈 동반자를 만나는 일인데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양면성을 다 갖고 있는 문제다. 청년부에 사람이 많다고 해서 만남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김석준= 청년들과 얘기해 보면 '외로움'도 고민이다. 활동적인 청년 세대이다 보니 그런 것 같다. 주변에 아는 사람도 많고 넓은 네트워크가 있어 여기저기 만나는 그룹은 많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깊게, 오래 만나는 관계가 많이 없는 편이다. 인간관계에 있어 '풍요 속 빈곤'이랄까…그 가운데 내면적 외로움을 느끼는 경우를 종종 본다. - 청년부에 있으면서 가슴 아픈 일도 많았겠다. ▶김찬석= 현실과 부딪칠 때다. 분명 자신이 꿈꾸는 미래에 대한 이상과 현실에는 괴리가 있다. 예를 들어 요즘 소그룹에서 얘기를 나누다 보면 실직 한 청년들이 너무나 많다. 밥을 먹으러 가도 지폐 한 장 편하게 내기 힘든 청년도 있다. 말 못할 사정의 청년들이 많기 때문에 소그룹에서 밥을 먹으러 갈 때 일부러 리더들이 비싼 데를 안가려고 한다. 불안정한 세대를 살아가는 요즘 청년들의 사회적 현실이기도 하다. ▶천수범= 한국과 달리 이곳은 이민사회라는 특수성도 있다. 신분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미국에서의 꿈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청년이 부쩍 많아졌다. 미국에 남는다 해도 신분 때문에 학비나, 일자리를 구하는데 제약을 많이 받는다. 눈물을 흘리는 청년들도 봤다. 옆에서 함께 고민을 나누다 보면 마음 아플 때가 정말 많다. - 그럴 때 청년들은 어려움을 어떻게 이겨내나 ▶김찬석= 개인적으로는 내가 노년 세대가 됐을 때를 상상한다. 그때가 되면 ‘몸과 정신이 가장 건강한 지금이 얼마나 그리울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청춘’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해도 때론 문제 자체를 즐긴다. 이것이 진정 ‘청춘의 힘’이 아닐까 싶다. ▶천수범= 청년부의 경우 70여 개의 소그룹이 있다. 소그룹은 10여 명 이내의 청년들로 구성된다. 구성원은 각기 다른 배경과 성격을 갖고 있지만 그 가운데 ‘청년’이라는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에 공감대가 형성된다. 다른 사람이 하는 고민이 나의 고민과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문제가 있으면 함께 고민하고 서로 조언을 하고 경험을 나눈다. - 10년, 20년 후에도 지금의 ‘청춘’을 외칠 수 있을까. ▶김석준= 요즘 사회는 엄청난 양의 지식정보가 쏟아져 나오고 변화의 속도도 빠르다. 사람들도 거기에 발맞춰 똑똑해지고 ‘스펙 쌓기’를 통해 경쟁력을 갖추는데 애를 쓴다. 하지만, 반면 인격을 다지고 내면의 깊이를 추구하는 일은 상대적으로 소홀한 듯하다. 분명 나에게 있어 몇십 년 후의 ‘청춘’의 의미는 지금과 다르겠지만, 그땐 깊이가 느껴지는 ‘청춘’을 살고 싶다. ▶천수범= 활동적인 지금 보다는 그때가 되면 ‘마음의 청춘’이란 말이 가슴에 더 와 닿겠다. 하지만, ‘청춘’이 담고 있는 의미에는 나이와 세대를 넘는 힘이 있지 않나. 그때는 또 다른 꿈을 꾸고 있을 것 같다. 내가 가진 직업을 통해 세계를 돌며 선교 등을 하는 것이다. 꿈을 꾸지 않는 순간 더 이상 나는 ‘청춘’이 아니겠지. ▶김찬석= 청춘…왠지 기분 좋아지는 말이다. 나중에 나이가 들어도 20대~30대가 느끼는 청춘을 공유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살고 싶다. 나는 항상 ‘청춘’이기 때문이다. 장열 기자 ☞남가주 사랑의 교회 청년부는 미주 지역 이민 교회에서 대표적인 청년 공동체(담임목사 윤대혁) 중 하나다. 매주 500여 명의 한인 청년들이 함께 모이고 있으며, 이들은 70여 개 이상의 소그룹에 편성돼 있다. 남가주 사랑의 교회 청년부는 60년대 후반 부터 80년대 후반까지 다양한 연령대로 구성돼 있으며, 소그룹을 비롯한 각종 훈련 프로그램과 모임 등을 통해 활발히 운영되고 있다.

2012-01-01

[나는 청춘이다] 박학다식에 '네이버'라 불리는 노준종 공인회계사

스물일곱에 꿈 안고 이민길 매사 긍정적 마인드로 대처 절주·금연·봉사로 체력관리 끝없는 호기심에 배움 열정 댄스·과학·IT·부동산 섭렵 지천명 앞두고 한의대 입학 방문 약속을 하고 그의 사무실을 들어서자, 그는 마침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언뜻 본 책의 제목은 '한의학을 말하다'라는 두꺼운 책이었다. 주위사람들로부터 불리는 별명이 네이버(Naver)라는 노준종 공인회계사는 올해로 50이 된다. 하지만 아직도 청춘, 그렇다고 마음만 청춘이 아니다.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청춘이다. 그의 청춘 얘기를 들어봤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리보서 4장 13절) 노준종씨 사무실에 붙어 있는 액자 속 성경의 한 구절이다. 모든 것의 시작은 1990년대에 시작됐다. 1990년대 초반부터 남가주에서 공인 회계사로 활동하고 있는 노씨는 전직 삼성맨이다. 군대를 마치고 대학을 졸업하고 삼성그룹에 공채로 신라호텔에 입사한 후 2년 남짓을 다녔고 다른 이민자와 마찬가지로 가족과 함께 청운에 꿈을 안고 미국에 도착한 나이는 27세였다. 한국에 계속 살았으면 지금쯤 임원이 되었을 텐데 노씨는 이민이라는 또 다른 옵션에 인생을 걸었다. 미국 도착 후 그를 기다린 것은 삼성 같은 대기업도, 신라호텔 같은 비즈니스도 아닌 늦은 나이에 도착한 이민자라는 사실뿐이었다. 그는 우선 전 직장의 경험을 살려 한인타운 호텔에서 파트타임으로 프런트 데스크를 지키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학원에 다녔다. 그렇게 그의 청춘은 호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무르익었다. 그는 야간에 프런트 데스크를 지키면서 미국을 배우기 시작했다. 현실에 안주해서는 안 되고 끊임없이 공부해야 급변하는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첫 번째로 되뇌였다. 또 사물을 긍정적으로 보는 눈을 갖게 됐다. 일을 하다 보면 만나게 되는 불안과 부정·부패에 굴하지 않으면서 그저 착한 사람이 아닌 현명한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2년 6개월 만에 공인회계사를 취득했다. 그 나이 또래 이민자들이 누구나 겪는 영어 불통을 헤쳐가며 노력 끝에 33세에야 1.5세인 부인(노동희씨)과 결혼, 가정을 일궜고 36세에야 첫 아이 영진군을 봤다. 37세에 둘째 영신, 39세에 셋째 영인군을 낳았다. 막내 돌잔치에 마흔이 됐으니 좀 늦었다. 결과적으로 적지 않은 나이에 첫 아이를 봤기에 아이들의 친구 아빠들과 5~8세 정도 나이가 많다. 아빠들이야 아이들 나이가 기준이 된다. 지금은 이제 40을 갓 넘긴 아빠들과 교류를 해야 하니 젊어질 수 밖에 없고 오히려 미국 오면서 손해를 봤던 8년을 젊은 아빠들과 어울리면서 보상받게 됐다. "처음엔 미국에 좀 더 일찍 왔었으면 좋았을텐데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하기 나름이죠. 긍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빠들과 나이를 맞추니 제가 젊어질 수밖에요. 아이들에게 젊은 아빠이고 싶었습니다." 마음가짐만 젊은 것은 아니다. 감사한인교회에서 자신의 아이들 또래 어린이들을 위해서 한국어 초등부 팀장을 맡고 있다. 아이들 하고 함께 노는 것도 그의 일이다. 그런데 인터뷰를 하다 보니 이상한 게 발견됐다. 노씨의 3형제가 모두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인데 한국어 초등부 출신이라는 것이다. 한국어부는 대개 한국에서 갓 온 학생들이 영어로는 주일학교에 다닐 수 없어서 운영되는 것인데 한국어를 얼마나 잘 가르쳤으면 한국어부에서 신앙생활을 할까. 그의 청춘 프로그램중 건강분야의 핵심은 절주와 금연이다. 그의 신체에는 알코올 분해효소가 없다. 담배도 입에 대본 적이 없다. 그의 프로그램엔 운동도 따로 없다. 틈나는 시간은 교회 봉사를 운동삼아 한다. 또 다른 청춘 프로그램은 하루 7시간씩 잠을 충분히 자는 데 있다. 얼마나 열심히 사는지 잠자리에 들고 30초면 숙면 상태에 빠진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무미건조한 생활이죠. 하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호기심을 충족해야 하는데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인생을 낭비하며 살기에는 청춘이 너무 짧아요." 노씨의 청춘에 걸맞은 삶의 핵심은 배우는 것에 대한 열정이다. 별명이 네이버라니, 네이버가 어떤 회사인가. 한국을 대표하는 지식사이트로 다양한 정보가 엄청나게 쌓여 있는 사이트 아닌가. 그는 다방면의 지식을 갖고 있는 제너럴리스트이기도 하다. 나이를 먹지 않는 무한한 호기심과 궁금증, 그것이 그를 청춘에 머물게 하는 배움에 대한 열정의 원동력이다. 비록 노안은 이미 왔지만 정신은 40대 초반도 아닌 30대이고 싶다. 그의 또 다른 모습은 최근에 열린 남가주 회계사협회 연말 파티에서 보여줬다. 바로 라인댄스 강사로 변신한 것. 행사 여흥시간에 참석자들을 이끌고 행사장을 춤판으로 만들었다. 무려 1시간 동안이나. 눈치가 빠른 사람은 왠지 그의 춤발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는 80년대 초 춤에 심취해 군무, 허슬, 디스코, 브레이킹 댄스를 현란하게 췄던 과거가 있었다. 1981년 12월부터 83년 초 그가 군대로 도피할 때까지 '춤꾼 노준종'이었다. 천문과학과 지구과학에 또 다른 관심이 있다. 남가주가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지역인 탓도 있지만 우리가 사는 땅덩이에 관심이 많은 것은 그로서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IT에 관심이 많아서 사서 보유하고 있는 도메인도 적지 않다. 사무실의 네트워크를 직접 설계한 것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배움의 열정 탓에 덕본 경우다. 그는 또 부동산 브로커 라이선스도 갖고 있다. 지난해 그의 호기심이 또 다른 사고를 쳤다. 다름 아닌 한의대에 입학한 것이다. 평소 동양철학과 동양의학, 대체의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래서 직접 배워보기로 했다. 대신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늦더라고 졸업은 할 생각이다. 3.5년을 잡았지만 4.5년은 걸릴 듯하다. "아마도 60대에는 머리도 더 벗겨지고 주름도 늘겠지만 침을 잘 쓰는 한의사가 돼 있을 겁니다. 은퇴를 맞은 후에 병마로 인해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즉효있는 침선생이 되고 싶습니다." 노씨가 청춘을 불태우며 이런저런 것을 배우고 한의대에 다니고 있지만 본업을 내팽개친 것은 아니다. 그가 인생을 건 회계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도 그는 열정 이상의 모습을 갖고 있다. "CPA라는 직업은 항상 익사이팅(exciting)합니다. 죽을 때까지 놓고 싶지 않은 직업이죠. 하지만 나이 먹어서 같이 늙어가는 사람들에게 침을 놔주고 싶어요." 그의 청춘은 배움에서 시작돼 봉사로 끝날 것 같다. 너무 배우는 것과 알고 싶은 것, 하는 게 많다고? 누구에게나 시간은 같다. 뭘 하느냐는 선택의 문제다. 노준종씨는 그것을 술과 담배, 골프에 두지 않고 배움의 열정에 쏟고 있다. 장병희 기자

2012-01-01

[나는 청춘이다] 이창수·김진협씨

KBS·MBC 출신 연주자 연주음반도 내놓은 프로급 해병대 군악대에서 만나 50년 넘게 음악동무 지내 젊음 유지하는 비법은 음악 나이 들수록 더 깊어져 "난 단순한 연주자가 아니야. 민간 외교관이지. 이 정도의 연륜은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지. 하하하" 은근슬쩍 자랑하는 말투가 밉지 않다. 집안에서나 밖에서나 '할아버지'라고 불리는 호칭이 익숙한 팔순을 맞았지만 경찰 유니폼을 입고 악기를 손에 잡으니 청년 못지 않은 에너지가 넘친다. LA경찰국(LAPD) 경찰악단에서 8년째 봉사하고 있는 이창수씨와 동갑내기 친구 김진협씨 말이다. 이씨는 이곳에서 트럼펫을, 김씨는 색소폰을 연주한다. 트럼펫도 색소폰도 모두 긴 호흡을 요구하는 악기들이라 폐활량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들의 연주에는 숨이 차거나 흔들림이 없다. 이들이 이곳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건 2004년 5월부터다. LAPD 경찰악단에서 활동하던 한인 후배 연주자가 김씨에게 권한 것이 계기가 됐다. "영어를 잘 모르는" 김씨는 "영어가 유창한" 이씨를 함께 끌고 갔다. 몇 년 후 이들의 입단을 권유했던 후배는 봉사활동을 그만뒀지만 이들은 8년째 남아 왕성한 연주활동을 하고 있다. 경찰악단 멤버는 모두 75명. 처음 입단했을 때만 해도 흑인 멤버 2명과 후배 1명을 빼고는 모두 백인이라 낯설고 서먹했지만 지금은 이들이 불참하기라도 하면 모두 안부를 묻고 걱정할 만큼 주요 멤버로 자리 잡았다. 처음부터 쉬웠던 건 아니다. "우리를 본 멤버들 모두 실력을 의아해했지. 나이 먹은 아시안들이 무슨 연주를 할 수 있겠느냐는 거겠지. 하지만 음악을 듣더니 눈빛이 달라지던 걸. 역시 실력을 보여주는 게 가장 효과적이지." 은근슬쩍 자랑하는 이씨는 MBC와 KBS 악 단원 출신의 전문 연주자. 트럼펫뿐만 아니라 악보 없이도 즉흥 반주가 가능한 피아노 연주 실력에, 가끔은 악보 편곡도 한다. 김씨 역시 미국에서 색소폰 연주 음반을 발매했을 만큼 프로다. 이들은 해병대 군악대에서 만나 의기투합한 후 50년이 넘게 음악 동무로 함께하고 있다. 김씨는 "우리는 눈빛만 봐도 서로 무슨 곡을 연주하고 싶어하는지 다 알거든. 이렇게 서로 호흡이 척척 맞는 친구가 없어." “가끔 초청받아 연주하는 이벤트 행사 때는 장소를 둘러보기만 해도 청중들에게 무슨 곡을 들려줄지 머릿속에 악보가 떠오른다”는 이들은 활짝 웃었다. ◇순수 자원봉사단 LAPD경찰악단 1914년 창단해 90년 가까운 역사가 있는 LAPD 경찰악단의 다른 이름은 '로스앤젤레스시 홍보대사'이다. LA와 뉴욕경찰국에만 경찰악단이 있다 보니 국가의 중요한 행사에는 꼭 초청을 받는다. 또 다른 도시에서도 초청받아 가끔 주말에는 장거리 공연을 떠나기도 한다. 연주자들은 50대 후반부터 순수한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돼 있지만 규칙은 엄격하다. 다저스 스타디움 근처에 있는 LAPD 경찰학교 오디토리엄에서 매주 수요일 오후 3시30분부터 3시간 동안 진행되는 연습에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 연주 스케줄도 빽빽하다. 한 달 평균 2~3개의 이벤트를 소화해야 한다. 매달 열리는 경찰학교 졸업식은 기본이다. 졸업식 행사가 오전 8시에 시작되기 때문에 행사 날은 새벽부터 서두른다. 또 매년 독립기념일에는 시미밸리에 있는 레이건도서관에서 공연을 한다. 이처럼 빡빡하고 힘든 연습과 공연 스케줄에 지쳐 대부분의 한인들은 중단한다. 이씨와 김씨는 "한인 연주자들이 여러 명 들어왔지만 오래 머무는 경우가 많지 않다. 자원봉사자의 삶을 즐기는 백인들과 달리 한인 이민자들은 아무래도 살아온 방식이 다르기 때문인 것 같다"며 "그래도 다행히 우리 뒤에 후배(김창훈·71·클라리넷)가 한 명 있어 맘이 든든하다"고 말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이씨는 항상 신앙생활을 위해 주말 장거리 공연만큼은 경찰악단에 '양해'를 구해왔다. 하지만 지난해 6월 21일부터 4박5일 동안 워싱턴D.C.에서 진행된 공연에는 참가했다. 한국전 기념행사에서 연주하기 위해서다. 공연 기간 동안 이씨는 연방의회에서 열린 6.25 참전 기념식 행사와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있는 케네디 센터의 밀레니엄 극장 등에서 공연을 펼쳤다. 케네디 센터에서는 후배 김창훈씨가 톱을 켜고 이씨는 피아노를 치는 듀엣곡을 연주해 관객들의 힘찬 박수를 받았다. "이래 봬도 내가 해병대 출신에 6·25 참전용사거든. 한국전 기념행사를 한다는 데 빠질 수가 없었지. 연주가 끝나는 데 진심으로 손뼉을 치는 관중을 보니까 뿌듯하고 지금까지의 봉사활동에 보람이 느껴지더라고." ◇청춘의 비결은 "열정" 이씨의 활동은 이뿐만이 아니다. 경찰악단 외에도 4년 전부터는 LA카운티 정부 소속의 '해롤드 재즈 밴드' 멤버로도 활동 중이다. 멤버 13명 중 절반이 경찰악단 멤버들이라 손발이 척척 맞는다는 이씨는 매주 화요일마다 올림픽과 커슨가 인근의 웨스트사이드유태인커뮤니티센터에서 두세 시간씩 연습한다. 목요일 오후에는 또 해피밴드의 연습을 위해 집을 나선다. 해피밴드의 연습실은 후배 김씨의 고등학교 후배가 운영하는 음악학원이다. 특별히 이 밴드는 멤버들이 한인과 미국인들이 섞여 있다. 주로 한인교회에 다니면서 찬양을 들려준다는 이씨는 "멤버 가운데 내가 가장 고령이지만 젊은 음악인들과 함께 하는 것이 좋아 열심히 연습에 참여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특히 "나이를 먹으니 음악이 더 깊어진다는 것을 깨닫는다"며 "같은 곡을 연주해도 젊었을 때와 느낌이 다르기 때문에 연습시간이 더 소중하고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지치지 않고 하루하루 왕성한 연주활동을 하는 이씨에게 젊음을 유지하는 비법을 공개하라고 재촉했다. "물론 운동하지.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서 집 앞의 공원을 한바퀴 걸어. 하지만, 아무래도 스트레스가 없기 때문인 것 같아. 내가 사랑하는 음악을 하는데 고민이 생길 수 있나. 좋아하는 음악을 하면서 삶을 적극적으로 사니까 나도 모르게 젊어지네. 자네도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수 있는 사랑하는 일을 찾아서 열심히 하게, 나처럼. 알츠하이머도 없다고. 하하하." 장연화 기자

2012-01-01

[나는 청춘이다] '폴리USA' 장영기 사장

자바시장서 18년째 파티복 돌다리도 두드리며 사업 입양아 위한 단체 기부 등 힘들게 번돈 선행으로 나눔 헐렁한 스웨터에 구김간 면바지. 구수한 인상에 뿔테 안경, 적당히 나온 ‘인격’(뱃살)까지, 누가 봐도 영락없는 이웃집 아저씨다. LA자바시장에서 18년 째 여성 파티복 전문업체 ‘폴리USA’를 꾸리고 있는 장영기 사장(48). '그래도 자바시장 의류업계에서는 알아주는 중견 기업인인데, 옷이 그게 뭐냐'고 하면 “일 하는 데, 편하면 됐지 뭐”라며 씨익 웃는다. 늘 그런 모습이라 어쩌다 양복이라도 걸치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비친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하고 물으면 정색을 하며 한마디 한다. “이게 원래 난데, 깔끔하고 샤프한 이미지….” 그럴 때면 뿔테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매가 예사롭지 않다. 장 사장의 '허허실실'한 이미지는 새해라고 해서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누구에게라도 편안한 모습, 하지만 사업과 관련해서는 번득이는 아이디어와 남다른 추진력으로 올해도 거침없이 달릴 태세다. 장 사장은 브라질의 명문 폴리공대를 나왔다. 1976년 한국에서 양품점을 하던 부모님을 따라 파라과이로 이주했다가 다시 브라질로 이민한 탓에 중학교부터 대학원까지 브라질에서 다녔다. 학부에서는 화학을 전공했고, 재료공학 석사를 했다. 학부 때는 부전공으로 법학도 공부했다. 사업체 이름에 폴리를 쓸 만큼 자부심도 대단하다. "어렸을 때 공부 좀 했지." 그러고 보니 뿔테 안경 너머로 제법 '범생이' 냄새도 난다. 드레스를 디자인해서 중국 봉제공장에 보내, 완제품을 수입, 도매하고 있는 장 사장은 머리가 비상하다. 셈이 빨라 장 사장과 거래를 했던 사람들은 혀를 내두른다. 다운타운에서 '은혜주얼리'를 운영하면서 중국에 봉제공장도 갖고 있는 전환수 사장이 들려 준 얘기다. "장 사장과 몇 번 거래를 했는데, 어찌나 계산이 빠른 지, 얘기를 하다 보면 어느 새 빨려 들어가고 만다. 원가 계산이 정확하고 비용 절감을 어느 단계에서 할 수 있는 지를 귀신같이 잡아내니, 당할 수가 없다"고 소개했다. 이에 대해 장 사장은 "중고교 시절 부모님의 봉제공장 일을 돕다 보니 옷을 생산하는 과정에 대해 잘 알게 됐다"며 "당시 내 또래 친구들은 다들 비슷했다. 봉제업을 하는 부모님을 둔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는데, 주말이면 그 친구들과 누가 더 빠르고 보기 좋게 박음질을 하느냐를 두고 내기를 했다"고 회생했다. 장 사장의 사업장은 다운타운 알라메다와 뉴튼에 있다. 2만5000여 스퀘어피트 규모의 건물에 사무실과 드레스 전시실, 디자인실, 물류창고가 모두 붙어 있다. 의류도매상가인 LA페이스마트 지하에도 쇼룸을 따로 갖고 있다. 지난해 다운타운 한인의류업계는 크게 고전했다. 계속되는 경기침체 탓에 대부분 업체가 50~70%까지 매출이 급감했을 것이라는 게 한인의류상들의 짐작이다. 그런 와중에도 장 사장은 2010년 대비 약간의 매출 신장을 기록한 것 같다고 말했다. 아직 재고물량을 파악하지 않은 상황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4~5% 정도는 는 것 같다고 귀띔했다. 매출 규모는 큰 편이 아니지만 파티복은 마진이 좋기 때문에 수익률도 꽤나 높은 편이다. 타켓이나 로스, 블루밍데일 같은 대형소매점을 상대하는 게 아니고 로컬 양품점이 주 고객이다 보니 주문 취소나 반품 등이 없는 것도 안정된 사업을 꾸리는 데 유리하다. 장 사장의 사업 스타일은 꼼꼼하다. 돌 다리도 두들기며 건너는 편이다. 디자인부터 원단과 색상 선택, 회계까지 직접 관리한다. 그렇다고 해서 장 사장이 마냥 장고만 하는 스타일도 아니다. 충분한 시장조사를 통해 일단 사업성이 있다고 판단하면 그 길로 밀어 부친다. 장 사장은 올해를 사업 다각화 원년으로 정했다. 지난해 초반부터 조용히 준비해 온 웨딩드레스 사업을 시작한다. 이미 샘플도 확보한 상태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장 사장은 성인용 파티복과 주니어 드레스만 제작했다. "웨딩드레스는 파티복 보다 마진이 더 크다. 기왕에 파티복 사업을 하던 터라 웨딩드레스 런칭은 크게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웨딩드레스 사업과 함께 또 하나 꿈꾸는 사업은 인터넷을 통한 'B2C(소비자 상대 세일)'다. "그동안엔 'B2B(도매상간 거래)'에 안주했는데, 앞으로는 인터넷을 활용하지 않고는 사업을 더 이상 키우기 어려울 것이다. 온라인 쇼핑사이트를 구축해 'B2B'와 'B2C'를 병행할 생각이다"고 말했다. 장 사장도 카카오톡이나 트위터 등 인터넷 SNS 이용에 있어서는 '살짝' 구세대다. 하지만 사업에 필요하다는 판단이 들면 절대 놓치지 않는다. 지난해 웨딩드레스 사업을 기획할 당시 새로운 인터넷 도메인 닷코(.co) 선점 경쟁이 펼쳐지자, 재빨리 웨딩드레스 닷코를 사들였다. "인터넷 경매로 200달러부터 시작했는데, 720달러까지 가서 기어코 살 수 있었다. 지금은 누가 8000달러에 팔라고 한다"며 만족해 했다. 늘 사업 확장을 꿈꾸고 준비하는 장 사장이지만 큰 돈을 벌 생각은 없다고 한다. "많이 버는 것 보다 잘 쓰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는 장 사장은 지난 연말엔 교회 지인의 소개로 입양아를 위한 자선단체 행사에 참석해 기부를 하는 등 선행도 펼치고 있다. 올해는 한인의류협회 부회장과 LA페이스마트 이사로도 왕성한 활동을 펼칠 계획이다. 김문호 기자 moonkim@koreadaily.com

2012-01-01

[나는 청춘이다] 일흔 여덟 '몸짱 아저씨' 스탠리 김씨

허리 통증 시달리다 운동하며 완치 각종 파워리프팅 대회서 우승 기염 무리하지 말고 꾸준하게 해야 도움돼 건강하면 어떤 난관도 이겨낼 수 있어 움직여라. 그러면 청춘도 돌아온다. 영국 런던 킹스대학의 유전역학자인 팀 스펙터 박사는 올해 초에 “일주일에 운동을 3시간 하는 사람이 15분 미만 운동하는 사람에 비해 생물학적 나이가 평균 9년 젊다. 또 일주일에 보통 강도의 운동을 1.5시간씩 하는 사람은 운동을 거의 하지 않는 사람에 비해 노화를 4년 지연시킬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그는 운동이 노화를 지연시키는 이유는 세포를 손상시키고 죽이는 산화 스트레스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 세상에 늙고 싶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늙음은 곧 육체적인 한계에 부딪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경제가 어려운 시기는 사람들의 기운을 빼앗아 노화를 부추긴다. 하지만 이에 맞서야 한다. 마음에 청춘을 품으면 몸도 청춘으로 되돌릴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샌피드로에 거주하는 스탠리 김씨. 그는 만으로 일흔 여덟이지만 그의 마음만큼은 ‘이팔청춘’이다. 외모와 거동을 보고 50대 후반쯤으로만 생각했던 기자는 그의 대답에 깜짝 놀랐다. 헬스클럽에서 힘차게 웨이트트레이닝 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더 충격적(?)이다. “허허. 인종에 불문하고 사람들이 다 나를 60세 전후로 봐. 지금도 ‘할아버지’보다는 ‘아저씨’ 호칭을 더 자주 들어.” 그는 지금처럼 경제가 어렵고, 미래가 불투명해 보일 때 몸부터 단련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의 마음이 청춘인 것도 바로 운동에서 나오는 원동력이라면서. 특히 나이가 들수록 운동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고 역설했다. 그리곤 뼈있는 한마디를 했다. “노화는 이 세상에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어. 하지만 노화를 늦출 수는 있지.” 역시 운동이 비결이었다. 이제는 마치 운동이 그의 직업이 된 듯 하다. 5피트 3인치의 그는 지난 2008년 6월에 아마추어 파워리프팅(power lifting) 대회 시니어 부문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아카디아에서 열린 ‘캘리포니아 시니어 올림픽 리프팅 대회’에서 275파운드 바벨을 벤치 프레스로 거뜬히 들어올려 챔피언이 됐다. 그의 우승은 패서디나 지역신문 ‘패서디나 스타 뉴스’지에 소개되기도 했다. 또 2006년에는 비스타에서 열린 ‘북미 아마추어 파워리프팅 대회’에서도 70-74세 270파운드 시니어 부문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노익장을 한껏 과시했다. 그는 “다른 한인 시니어들에게 내 우승이 모티베이션이 됐음 하는 바람이다”며 “아령 운동과 같은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면 근육조직을 젊게 만든다. 시니어들도 얼마든지 젊게 살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실제로 버크 노화 연구소가 발표한 연구논문에 따르면 65세 이상 건강한 노인 25명에게 1주일에 두 번 1시간씩 웨이트 트레이닝을 6개월 계속하게 한 결과, 노화하던 근육조직이 활력을 되찾았다. 김씨도 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1992년 쯤이었어. 그때 허리에 갑자기 통증이 막 느껴지기 시작하더라구. 너무 괴로워서 이 병원, 저 병원을 다 다녔지. 그런데 전혀 낫지를 않는거야. 의사는 수술을 권유했어. 수술을 받기 전에 마지막으로 ‘운동을 한 번 해보자’는 마음이 생기더라고. 그래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했지.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때부터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더라구. 그때부터 운동은 나의 벗이 됐어.” 그는 젊은 사람들보다 더 힘차게 벤치 프레스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몰래 희열을 느낀다고 했다. “내가 먼저 나이를 밝히기 전까지는 내가 몇살인지 도통 모르지. 특히, 헬스클럽에서 내가 250파운드 바벨을 거뜬히 드는 걸 보면 사람들이 몇살이냐고 물으면서 깜짝 놀래. 가장 중요한 것은 젊건, 나이가 들건 꾸준히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거야. 노화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어. 다만 그게 왔을 때, 어떻게 받아들이는가가 중요해. 인생에서 엄청난 장애물을 만난 것처럼 큰 충격으로 다가올 수도 있어. 하지만 운동을 꾸준히 하면 노화를 최대한 늦출 수 있다는 것 하나는 내가 약속할 수 있어.” 하지만 그는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만 못하다면서 운동을 과하게 하는 것은 절대 안된다고 강조했다. “매일 하면 안돼. 이틀에 한 번꼴이 좋아”라며 어떤 것이든 항상 긴장된 상태는 안 좋은 것이라면서 근육도 풀어줄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가 운동과 함께 강조하는 게 또 있다. 바로 금연. “담배는 절대 피면 안돼. 물론 담배 피는 이유도 어느정도 타당성이 있어. 긍정적인 면도 없다고 할 순 없지. 집중력이 좋아지고 정신적인 휴식을 준다는 점이 있다는 건 인정해. 하지만 그 외에 너무나 해로운 게 많아. 인체에 유해한 물질만 4000가지가 넘는다고. 이 정도만 돼도 담배 끊을만하지 않아?” 구강암, 폐암, 폐기종, 위궤양, 방광암, 뇌출혈 등 담배로 인한 병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며 흡연자들에게 거듭 끊을 것을 당부했다. 몸이 건강해야 어떤 난관도 이겨낼 힘이 생긴다는 그의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스탠리 김씨는 한국 외국어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휘문 고등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활동했다. 남가주에 그의 제자들이 상당수 된다는 그는 1978년에 도미, 항공 엔지니어 업계에 종사하다 90년에 은퇴했다. “청춘이 뭐 따로 있나? 건강하면 그게 바로 청춘이야”라고 강조한 그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지금부터라도 바벨을 들 것을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원용석 기자 won@koreadaily.com ※스탠리 김씨의 ‘청춘 지키기’ 10계명 1. 적절한 신체 활동 2. 균형 잡힌 식사 3. 어려서부터 적절한 몸무게 유지 4. 적절한 수면 5. 규칙적인 생활 6. 금연 7. 절주 8. 긍정적인 마음 9. 정기적인 건강검진 10. 과욕 버릴 것

2012-01-01

[나는 청춘이다] 플러싱 경로회관 유종옥 부관장

진짜 원하는 일이 무엇인가 50세에 사회복지 공부 결심 여고 졸업후 수십년만에 일하면서 억척스레 공부 외동딸도 '봉사 인생' 진로 엄마 이어 소셜워커 길 걸어 의지 있으면 나이 상관없어 또래 노인 도우며 '즐거운 삶' 매일 점심시간 전후로 250여명의 노인이 플러싱에 있는 뉴욕한인봉사센터(KCS) 플러싱경로회관을 가득 메운다. 넓은 회관 안에 있는 작은 사무실은 늘 복지혜택과 관련한 문의를 받으려는 노인들로 북적 이는데, 이들의 민원을 일사천리로 해결하는 사람이 있다. 소셜워커인 유종옥(60·사진) 부관장이다. 유씨는 시 정부에서 제공하는 메디케이드·메디케어, 노인아파트 입주신청, 노인 렌트 인상 면제 프로그램 등 은퇴한 한인 노인들이 복지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매일 수십 명의 민원을 해결한다. “경로회관에서 돕는 노인들은 나와 나이가 비슷거나 조금 많은 연배”라며 “이들을 도울 때마다 입장을 바꿔보고 ‘언젠간 나도 도움이 필요할 수 있다’는 생각하면 이들에게 헌신할 수밖에 없다. 나도 은퇴할 나이가 되면 어떻게 스스로 렌트를 내고 병원에 다닐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의 나이 60세. 환갑인 유씨는 “지난해 헌터칼리지에서 사회복지학 석사과정을 마친 후 소셜워커 칭호를 얻게 됐을 때 인생의 전성기가 막 시작됐다”고 말하며 어깨를 들썩였다. 환갑의 나이에 청춘이 꽃피운 것은 유씨가 50세에 발견한 꿈 덕분이다. 아버지를 8세에 여읜 가정형편 때문에 인천여고 졸업한 것이 최종학력이었던 그는 10여년 동안 뉴욕일대 네일업소 기술자로 일하다 지난 2001년 나약칼리지에 사회복지 전공으로 수십년 만에 공부를 시작했다. “단순 노동직에 종사하다가 시력이 나빠지자 특별한 목표 없이 살던 지난날을 돌아보고, 진짜 원하는 일이 무엇인가 고민하게 됐습니다. 간호원 등 남을 돕는 일을 꿈꿨던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사회복지 분야의 전문가로 변신하려고 마음 먹었죠. 사회복지 전공 공부로 제 노후를 대비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 더욱 열정적으로 공부하게 됐습니다.” 유씨는 대학 4학년이었던 2004년부터 뉴욕한인봉사센터(KCS)에서 파트타임, 이듬해 KCS 산하 플러싱경로회관 케이스매니저로 일했다. 이에 만족하지 않고 소셜워커가 되려고 대학원 진학을 지망, 지난 2008년에 시 노인국의 장학생으로 선발돼 헌터칼리지에서 2년 동안 사회복지학 석사과정을 거쳐 올해 졸업했다. KCS는 그의 열정을 높이 사서 지난해 경로회관의 모든 사무업무를 총괄하는 부관장으로 승진시켰다. 그는 “대학원에서 영어 때문에 또래 학생들보다 과제물을 하기 힘들고 발표 할 때마다 긴장하기 일쑤였다”면서도 “공부가 재밌어서 열심히 한 결과 영어가 부족했는데도 꽤 많은 A학점을 받았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유씨는 KCS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2004년 이후 매주 토요일 시 노인국 ‘프렌들리비지팅’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한인 독거노인들을 4~5명을 방문하고 10여 명에게 전화로 말동무가 돼 준다. 대부분 회관에 찾아오기 힘든 조건의 노인들이다. 그는 “노인들이 자식 걱정하는 등 소소한 이야기를 털어놓고 외로움을 나타낼 때마다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삶의 위로가 된다”면서 “가장 흐뭇하고 보람된 시간이어서 아무리 바빠도 7년째 하루도 빼먹지 않고 토요일 시간대를 비워놓고 있다”고 말했다. 유씨는 방문시 노인들이 시 정부에게 받은 각종 공지문과 서류들을 해석해주고 직접 업무대행을 실시하기도 한다. 유씨가 이 같이 인생의 2막을 시작하기까지 이겨내야 했던 역경과 고난은 무수했다. 지난 1988년 남편과 한 살배기 딸을 데리고 미국에 이민 온 이후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봉제공장, 샐러드바 등에서 일하며 고된 이민생활을 이어갔다. 잭슨하이츠인 74스트릿에서 기념품가게도 마다하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이 도박 중독에 빠져 생활비를 탕진했고 심지어 결혼반지까지 팔아 노름하는 것이 일쑤였다. 유씨는 스스로 변호사를 선임해 남편과 1992년 이혼하고 2년 뒤 지금의 남편과 재혼했다. 유씨는 덤덤한 말투로 이 같은 과거를 회상했다. “오로지 미국에서 생존하기에 급급했던 시절입니다. 하지만 내가 진정 원하는 일을 추구하고 자신을 위해 투자하기로 결심하니 미국은 역설적이게도 기회의 나라임을 알게됐습니다.” 연방·주정부는 학자금지원프로그램(TAP)프로그램을 제공, 유씨는 이를 신청한 뒤 등록금의 절반에 가까운 금액으로 대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공부를 하고자 마음만 먹으면 나이 상관없이 자기계발할 수 있습니다. 과거 소년가장이었던 오빠와 6남매가 살아가는 가정형편 때문에 고교 졸업 후 대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눈치 보이고 돈도 없었죠. 지금은 시대도 변하고 미국의 교육 환경도 좋아졌습니다. 언제든 도전하세요.” 유씨는 억척어멈이다. 늦은 나이에 공부하기로 결정한 뒤 모든 학비를 스스로 벌면서 하나밖에 없는 딸을 양육해 왔다. 나약대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도 수입이 짭짤했던 네일업소에서 계속 일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사회복지 전공으로 대학 다닐 땐 딸이 고교생, 대학원 재학할 시기엔 딸이 대학생이었습니다. 공부하는 동시에 돈 버는 와중에 오히려 딸 아이와 유대관계가 좋았어요. 학교 에세이 등 과제물을 완성하면 영어가 편한 딸에게 검토 받으면서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재미있는 모습이죠(웃음).”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 사이언스를 전공하던 유씨의 딸 이슬기(24)씨는 유씨와 함께 프렌들리비지팅 프로그램 등의 봉사활동을 하면서 진로를 바꿨다. 유씨의 꿈이었던 소셜워커가 되기로 결심한 것. 이씨는 코로나에 있는 카톨릭 노인아파트에서 소셜 코디네이터로 지난 2년 간 일하고, 올해 가을학기부터 포담대학원 사회복지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유씨는 “딸은 대학교 다닐 때부터 너싱홈에서 인턴생활할 정도로 봉사활동을 좋아했다”면서 “내가 대학원 다닐 때 구입한 전공서적들을 딸이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게 신기하고 대견하다”고 말했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 50세에 공부를 시작한 뒤로 더욱 높은 기준의 꿈을 꿀 수 있게 된 유종옥씨. 환갑을 넘기는 새해 다짐과 꿈은 무엇일까. “뉴욕에 있는 대부분의 한인 경로회관이 자체소유의 건물이 없이 렌트를 내면서 장소를 빌리는 실정입니다. 따라서 수용 가능한 인원 제한도 있고 이들에게 다양한 세미나와 강습을 하기엔 장소의 제약도 있죠. 은퇴하기 전에 넓은 회관이 건립돼 더욱 많은 한인 노인들에게 복지혜택을 제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양영웅 기자 jmhero@koreadaily.com

2012-01-01

[나는 청춘이다] 72세 노익장 마라토너 이남석씨

30년 등산 경험 바탕 64세에 데뷔 5년전 무리하다 근육 파열로 좌절도 "뛰는 순간은 나를 위해 보내는 시간" 지난 5월 15일, 펜실베이니아의 포코노 도로 한 복판에 한 노인이 힘겨운 표정으로 달리고 있다. 바로 뒤로 두 대의 경찰 오토바이와 경찰차 한 대가, 곧바로 앰뷸런스 한 대가 천천히 뒤따른다. 이후 수백 대의 자동차가 앞질러 가지 못하고 이 노인의 움직임에 따라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이남석(72·뉴저지주 포트리)씨. 당시 그는 자신의 31번째 풀코스(26.2마일·42.195km) 마라톤인 ‘2011 포코노 마라톤 대회’에 출전 중이었다. 800여 명의 출전자 중 그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전날부터 배가 좋지 않아 무척 고생했는데 이날도 마찬가지였죠. 온몸에 힘이 없었고 뛰다, 걷다를 반복해야만 했어요. 언제부터인가 뒤를 돌아보니 경찰차와 앰뷸런스가 ‘내가 쓰러지기라도 할까 봐’ 따라오고 있었고, 그 뒤에는 자동차들이 새카맣게 따라오고 있지 뭡니까. 경적을 울리는 차는 한 대도 없었어요. 나 같은 아시안 늙은이 한 명을 위해… 이런 대접을 받는구나 생각하니 흐뭇하기도 했어요.” 당시 이씨의 기록은 6시간. 마라톤 세계기록 2시간 3분 38초(케냐의 패트릭 마카우)와 비교해서는 4시간이나 차이가 났다. 하지만 그는 “결승선을 통과하자 많은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격려해줬다”며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지만 바로 이 맛에 뛰나 싶었다”고 활짝 웃었다. 이 대회 참가자 중 최고령자였던 이씨는 아름다운 꼴찌였다. ◆처음부터 큰 시련=그가 마라톤을 시작한 건 환갑을 넘긴 64세부터였다. 이미 30년 이상을 등산을 해왔던 이씨는 ‘언젠가 마라톤을 해보고 싶다’는 소망을 실천했다. 그는 “건강에는 자신이 있었다. 하체도 단련됐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더 늦기 전에 해보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권이주 회장이 이끄는 뉴욕한인마라톤클럽에 가입했다. 첫 마라톤 완주까지는 1년 여가 걸렸다. 2005년 11월 필라델피아 마라톤대회에 첫 풀코스에 도전을 했고 5시간 9분이라는 기록으로 당당히 결승선을 통과했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얼마나 더 빨리 달릴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이듬해 센트럴파크에서 열린 뉴욕마라톤클럽(NYRR) 주최 18마일 단축 마라톤 대회에서 직접 알아보고 싶었다고. “사력을 다해 뛰었어요. 보통 풀코스를 뛸 때는 천천히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끝까지 달리는 게 중요한데 당시엔 조금 무리다 싶을 정도로 빨리 뛰었죠.” 10마일을 넘을 때까지도 이상 없었다. 하지만 결승선을 3마일 여 앞뒀을 때 갑자기 다리에 힘이 빠졌다. “버티고 싶었는데 나도 모르게 쓰러지고 말았다”는 그는 기다시피 코스를 벗어났고, 택시를 타고 동네 정형외과로 갔다. “오른쪽 엉덩이와 무릎 등 근육이 파열됐었어요. 무리를 했던 결과였죠. 순간 ‘아, 이제 더 이상 뛸 수 없구나. 이게 끝이구나’ 좌절했어요.” 당시의 힘겨웠던 상황을 떠올리면 아직도 긴 한숨이 나온다는 이씨. 이후 처음에는 제대로 걷지도 못했고 6개월 동안은 양손에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만 했다. ◆오뚝이처럼 일어서다=그러나 다리 부상이 ‘달리고 싶다’는 그의 열정을 이길 수 없었다. 그는 지팡이를 내려 놓은 시점부터 연습을 시작했다. 주치의는 물론 가족들도 말렸지만 그는 이를 악 물었다. 그는 “처음엔 걸었고 조금씩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욕심 내지 않고 내가 할 수 있을 만큼 조금씩 훈련양을 늘렸다”며 “이전에 건강에 자신했던 나 스스로를 돌아보며 겸손함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후 마라톤 완주 행진이 시작됐다. 매년 5차례 전후로 마라톤대회에 출전했던 그는 지난 5월 1일 로드아일랜드의 ‘콕스 프로비던스 마라톤 대회’에 참가해 풀코스 30회 완주라는 기록을 세웠다. 마라톤 시작 8년 여 만의 일이었다. 더욱 의미가 컸던 것은 4시간 58분으로 당시 70세 이상 부문 1위를 차지했던 것. 그는 2000년대 후반에는 수 차례 걸쳐 65~70세 부문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지난 11월 필라델피아 마라톤대회까지 32차례 풀코스를 완주했다. 그는 기억에 남는 대회를 묻는 질문에 “2007년 뉴욕마라톤에 참가했는데 당시 한인임을 알리고 싶어 대형 태극기를 들고 처음부터 끝까지 뛰었는데 가두의 뉴요커들이 ‘코리아’를 외쳐주며 응원해줬을 때 힘이 절로 났다”고 말한 뒤 “물론 부상을 당했던 센트럴파크 단축마라톤 대회도 잊을 수 없다”고 답했다. ◆“나는 마라톤 전도사”=젊은 사람들도 힘든 마라톤을 30차례 이상을 70대 노인이 뛴다는 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뛸 때마다 고통을 느낄 텐데,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뛸 때마다 내 삶 가운데 잘못한 것은 없는지. 어제 잘못한 것은 없나. 오늘은 무엇을 해야 하나 등을 떠올리죠.” 자타가 공인한 72세의 철각이지만 여전히 주변인들은 걱정 반, 응원 반이라고. 그는 “나 때문에 마라톤을 시작한 사람들이 많다. 특히 몸이 좋지 못했던 분들이 달리면서 치유되는 것을 볼 때면 ‘마라톤 전도사’를 자처하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고려대 상대 출신인 그는 1975년 미국에 와서 30년 이상 세탁소를 운영했다. 지난 3년 전 은퇴를 한 그는 ‘인생 이모작’을 시작했다. 뉴저지와 뉴욕의 부동산 브로커 시험을 통과해 당당히 브로커로서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70세 넘어 공부한다는 게 쉽지 않았지만 일을 할 수 있다는 즐거움으로 열심히 했다. 이게 다 마라톤을 뛰면서 얻어진 정신력과 자신감 때문”이라며 또 다시 주제를 마라톤으로 돌렸다. 22일 오전 4시, 이씨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눈을 뜬 뒤 곧장 인근 허드슨강변을 달리기 시작했다. 가로등 조차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을 가르는 이씨는 “고요한 새벽길을 뛰다 보면 몸에는 서서히 열이 오르기 시작하면서 땀이 난다. 24시간 가운데 유일하게 나만을 위해 보낼 수 있는 시간”이라며 “육체는 물론 정신까지도 건강해지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언제까지 달릴 수 있을 것 같는지’ 물었다. “몇 년 전 뉴욕마라톤에서 86세 일본계 마라토너를 만났어요. 90세 이상 되는 마라토너를 만난 적도 있어요. 꿈이요? 나도 저 사람들처럼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상태로만 달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 육체적인 나이는 이미 ‘노인’이었지만 꿈을 말하는 그의 눈빛은 어느 젊은이만 못지 않았다. 강이종행 기자 kyjh69@koreadaily.com

2012-01-01

[나는 청춘이다] 매일 만보 걷기·크게 웃기로 말기 암 극복 김정구씨

청춘(靑春). 봄날처럼 푸르른 나날들.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기. 혹자는 지나가면 다시 못 올 시기가 청춘이라고 하고, 혹자는 가끔씩 꺼내어보며 그리워하는 시절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미국 시인 사무엘 올먼은 말했다. “누구나 세월로 늙는 것이 아니라 이상을 포기할 때 늙게 되는 것. 때로는 20세 청년보다 60세 노인이 더 청춘일 수 있나니….” “으 하 하 하 하∼!” 중견 연기자 최불암씨 같기도 하고, 산타클로스 같기도 한 웃음소리로 고개를 뒤로 젖히며 웃는다. 웃을 일이 없어도 이렇게 웃다보면 엔돌핀이 샘솟는단다. 그러더니 이내 허리춤에 찬 만보기를 확인하곤 “오늘은 3000보를 덜 걸었다”며 “이런 날은 계단이라도 오르내려 1만 보를 채워야 된다”고 서두른다. 허리춤에 매달린 만보기와 절친한 동지가 된 것은 지난 2000년 ‘전립선 암 말기’ 판정으로 6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후부터. 그런데 ‘말기암 선고’가 그의 삶을 ‘청춘’으로 돌려놨다. 헤이워드 거주 81세 김정구 할아버지 이야기다. # 나는야 ‘이팔 청춘’= 나이를 묻자 “내년에 이팔 청춘!”이라고 답했다. “82를 거꾸로 하면 28아닌가? 난 내년에 이팔청춘 되는데?”라며 웃는데 그 웃음이 소년처럼 해맑았다. 웃을 때 드러나는 가지런한 치아는 의치 하나 없이 모두 본인의 치아다. 매일같이 만보기에 1만 보를 채우는 것이 건강 관리의 전부이자 매일의 보람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 허리사이즈 34인치를 줄곧 지금껏 유지해오고 있다는 그는 아들, 사위와 같은 치수의 바지를 입는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큰 소리로 웃으려고 노력한다”며 ‘김정구식 웃음 법’을 가르쳐 준다고 두 손을 번쩍들었다. 뱃 속부터 우러나오는 소리로 고개를 젖히고 웃는 모습에 취재를 하는 기자까지 웃음이 터져 버렸다. 우울함이라고는 모르고 살았을 것 같은데, 아니었다. “은퇴 후 노인성 우울증으로 2년간 고생을 했어요. 놀면 좋을 줄 알았는데, 시간이 많아지니까 무기력함이 찾아들고 심지어 목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성경도 멀리했으니까요. 심했을 때는 말도 잘 못했습니다.” 김옹은 “은퇴 직후의 관리가 사실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에서 ‘암 서바이버’로= 젊은 시절부터 신경 쇠약증을 비롯해서 잔병이 많았던 그는 전직 목사다. 지난 2000년 하와이에서 목회를 하던 중 ‘전립선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그것도 내과 의사인 둘째 아들에게 받은 선고였다. “6개월 정도 남은 것 같다는 말을 우리 아들한테 들었는데…, 말기인데다가 상태가 너무 심해서 수술도 불가능한 상황이었어요. 은퇴 후에 노인성 우울증까지 겪던 시기에 그렇게 병마가 찾아왔어요. 선고를 받은 날부터 하루를 더 살아도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걷기, 웃기를 시작했습니다. 살고싶은 마음도 간절했지만, 우울증으로 힘들었던 지난 2년에 대한 보상심리도 있었죠. 남은 나날들을 무엇보다 ‘행복’하게 살다 가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 쥬스 만드는 남자= 아들, 며느리와 함께 사는 그의 별명은 ‘쥬스 부장’‘테이블 매니저’다. 새벽 4시30분에 기상하는 그는 아침 산책 후 아들과 며느리를 위해 매일같이 손수 당근 쥬스를 만든다. 식사시간마다 테이블 세팅을 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생각나면 하고, 안나면 안하는 그런 일이 아니라 가족공동체 안에서 ‘내 일’이라는 책임감을 느끼면서 해서 그런지 보람있고 행복해요. 나이를 먹으면서 잃어가는 것 중 가장 큰 것이 존재감과 책임감, 그리고 보람이에요. 남자들은 특히 은퇴 후에 더 심해지는데, 그 공허함을 채워질 무언가가 필요한 거죠. 내가 나이 들었기 때문에 대접받아야 한다(?) 그런 생각부터 버려야 청춘같은 마인드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몸만 청춘이면 뭐합니까. 마음이 청춘이어야, 진짜 청춘이지.” 김정구옹의 청춘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황주영 기자 sonojune@koreadaily.com <김정구옹의 건강유지 비결> ◇일, 십, 백, 천, 만 법칙 1. “하루에 좋은 일을 1 가지씩만 선행을 하자”= 누군가의 말동무가 되어주는 것조차 선행이다. 10. “하루에 10사람을 만나 소통하자”= 사람과의 교류, 친교는 장수의 가장 큰 비결이다. 100. “하루에 100자를 쓰자”= 나이가 들다보면 손으로 글씨를 쓰는 일이 거의 없어진다. 1000. “하루에 1000자를 읽자”= 신문, 종교서적 뭐든 읽을 거리로 뇌세포를 깨운다. 10000. “하루에 10000보를 걷자”= 가능하면 만보기 착용이 도움이 된다.

2012-01-01

[나는 청춘이다] 오클랜드서 바디샵·주유소·편의점 운영 김명천씨

검도로 12년간 체력 다져 2인조 강도 맨손으로 제압 매일 할 일 있다는게 행복 운동 병행 심신이 함께 튼튼 “진짜 ‘청춘’은 환갑부터”라며 활기찬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젊은 오빠’ 김명천씨(60). 김씨가 강조하는 청춘 비결은 ‘열심히 일하는 것’. 물론, 꾸준한 운동을 통해 몸과 마음을 튼튼하게 해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1951년 1월생으로 꽉 찬 환갑이지만 김씨는 오클랜드에서 바디샵과 주유소, 편의점을 함께 운영, ‘쓰리 잡’을 뛰면서도 힘들어하는 기색이 전혀 없다. ‘젊은 강도’도 물리친 든든한 체력과 만사 긍정적인 생각이 항상 받혀주기 때문이다. 프리웨이 진입로 인근 외진 지역에 자리잡은 업소의 위치와 늦은 저녁까지 문을 열어야 하는 편의점의 특성상 가끔 좀도둑에서부터 무장 강도에 이르기까지 ‘불청객’들이 등장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맨손으로 그들을 제압하고 경찰에 인계하기도 했던 김씨의 활약상은 이미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최근에는 권총으로 무장하고 들이닥친 2인조 강도를 몽둥이 하나로 제압, 한명을 순식간에 들어올려 바닥에 메다꽂았고 이에 놀라 줄행랑치는 용의자들을 오히려 끝까지 뒤쫓아 검거하기도 했다. 지난 2008년에는 오클랜드의 한 마켓에 흉기를 든 강도가 들어 마켓 직원과 격투가 벌어졌는데, 마침 현장에서 장을 보고 있던 김씨가 거들어 강도를 제압하고 경찰에 넘기기도 했다. 김씨는 “강도들을 때려잡고 위험한 순간을 겪고 나면 가끔은 무모하다 싶을 정도의 내 행동에 대한 반성과 후회도 든다”면서 “하지만 생각하고 판단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몸이 먼저 앞서니 어쩔 도리가 없다”며 껄껄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씨는 합기도 4단의 유단자다. 게다가 미국 이민 후 시작한 검도로 12년간 체력을 다져왔다. 하지만 김씨가 처음부터 강도도 때려잡는 ‘열혈 청춘’이었던 것은 아니다. 김씨는 누구나 그러했듯이 81년 도미 후 5년여간 주유소, 바디샵, 사무실 청소 등 하루에도 두세 개 이상의 파트타임 일을 하며 정착 세월을 보냈다. “본격적으로 비즈니스를 운영하면서부터는 정비업의 특성상 몸을 구부리고 움직이는 시간이 늘고, 운동이 아닌 ‘노동’을 하다보니 몸과 맘이 더욱 피폐해지더라고요.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봤는데 그 안에 술, 담배, 삶의 무게에 찌들어 있는 어떤 초라한 중늙은이가 있습디다. 삶의 회의가 느껴졌지요.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어요.” 김씨는 그 후 술과 담배를 딱 끊었다. 그리고 검도를 시작했다. 오랫동안 담을 쌓았던 운동과 친해지려니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김씨는 “고작 이렇게 살려고 고향까지 떠나왔던가”하는 생각에 이를 악물었다고 했다. 6개월을 버티니, 슬슬 운동에 대한 인이 박히기 시작했다. 마음이 점점 긍정적으로 바뀌고 몸도 가뿐해지니 일하는 것도 즐거워져 능률도 훨씬 높아지더란다. “시간을 쪼개 바쁘게 활용하다 보니 환갑이란 나이도 잊고 산다”는 김씨는 세 가지 비즈니스를 동시에 운영해야 하는 바쁜 생활 속에서도 일주일에 최소한 다섯 번씩은 꼬박 도장에 출석하며 운동을 거르지 않는다고 한다. 젊은 청춘들과 어울려 운동하고 교류하면서 자신도 청춘이 되어감을 실감한다는 김씨는 현재 전미검도연맹(AUSKF) 회원으로서 매년 4∼5회 이상 각종 전국 및 국제대회에 출전, 상을 휩쓸며 ‘청춘’을 과시하고 있다. 김씨의 운동 예찬은 끝이 없다. 그러면서도 김씨는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운동을 해서는 안된다”며 “정신을 수양하고 몸과 마음을 튼튼히 기르다 보면 자신감, 침착함, 마음의 평정을 얻게 되고 그러다 보면 위급한 상황에 대한 대처능력도 저절로 길러진다”고 말했다. ‘일의 신성함’에 대한 찬사도 이어진다. “일을 해야 늙지 않는다는 옛말이 진리예요. 소속감이 있다는 것, 아침에 눈떴을 때 할 일이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입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도 있잖아요. 일을 즐기세요. 안 늙어요. 안 늙는게 청춘이지, 뭐 특별한 것 있나요.” 김씨는 “나는 영원한 청춘”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양정연 기자 jyang@koreadaily.com

2012-01-01

[나는 청춘이다] 65세 단역배우 권희완씨

“젊은 시절보다 더 신납니다. 그런게 끼 아니겠습니까. 작은 재능이라도 있으면 건강한 이상 다 써먹을 겁니다.” 한국에서 극단 생활을 접고 미국 이민길에 오른 것이 벌써 25년 전. 더 나은 벌이를 위해 새 직업을 택했던 권희완(65·사진)씨는 요즘 다시 청춘을 찾았다. 지난해부터 출연한 미국 영화, 드라마, 광고 등만 10여편. 몇 컷 안되는 단역이지만 촬영 순간 순간이 ‘살 맛’이다. ◇연극과의 조우 연기를 시작한 것은 서울 양정고교 시절. 1년 선배였던 탤런트 이정섭씨가 출연한 장막극 ‘유태인의 거리’를 감명 깊게 본 것이 계기였다. 마침 대회 출전을 위해 회원 모집 중이던 연극반에 들어가게 됐다. ‘전유화’라는 작품을 통해 처음 무대에 섰지만 남자 학교였던 탓에 여자역으로 신고식을 치렀다. 연극부 선배들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동국대 연극영화과로 진학했다. 제대 후에는 극단 ‘가교’에서 3년간 활동하며 단막극과 성극 등 다양한 무대에 올랐다. ◇이민 그리고 새로운 진로 무대는 좋았지만 밥벌이는 힘들었다. 마침 친구를 통해 미국에 살고있던 지금의 아내를 소개받고 편지와 사진을 교환하며 결혼을 결정, 1977년 이민길에 올랐다. 권 씨는 “어려운 시기에 미국에 오면 수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다”면서 “애들 뒷바라지 해야는데 말이 안되더라. 연기를 포기하고 다른 재능을 찾았다”고 말했다. 평소 꾸미는 것을 좋아한 덕분에 인테리어 디자인 학교에 진학했다. 졸업 후 미국 회사에 취업, 10년 간 일하다가 지난 1990년 ‘권 인테리어’를 설립해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연극에 대한 미련 각자 다른 사정으로 포기했지만 권 씨처럼 무대를 그리워하는 시카고 한인들이 많았다. 1986년 시카고 연극영화인 협회가 설립돼, 창립작품 ‘춘향전’이 제작됐고 권 씨는 이 도령 역을 맡았다. 이 후 10년간 ‘시집가는 날’, ‘LA 아리랑’ 등 2년에 한 번씩 작품이 만들어졌고 권 씨는 3대 회장을 맡은 후 10년간 재임하며 활발히 활동했다. 권 씨는 “작품당 제작 기간은 4개월이 넘는데 각자 주업은 있고, 품도 많이 들어 자연히 구성원들이 흩어졌다. 협회가 와해됐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고 말했다. ◇새로운 시작 어느새 딸과 아들이 직장을 찾아 뉴욕으로 떠나면서 시름은 덜고 시간은 늘었다. “협회원을 모으기엔 벅찼지만 아직도 속엔 끼와 열정이 있었다. 이 끼를 죽기 전에는 써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에이전시를 찾았다.” 두 곳에 배우 등록을 하고 시카고 지역 배역 캐스팅이 있는 곳이면 할리웃·대학 영화, 드라마, TV·프린트 광고 등 가리지 않고 오디션을 봤다. 지난해 1월 이후 치른 오디션만 20여차례. 대사 1~2개의 단역이지만 경쟁은 치열하다. 권 씨는 “각계 아시안이 다 도전한다. 배우 지망생들은 웨이터 생활을 하며 단역에 달려든다”면서 “대충해서는 안되겠구나. 철저하게 준비하자고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컨테이전’ 일본 보건국장부터 ‘월그린’ 직원까지 그렇게 따낸 작품들이 영화 ‘컨테이젼’, FOX 드라마 ‘시카고 코드’, 광고 ‘트레저아일랜드 카지노’, ‘월그린’ 등이다. ‘컨테이전’은 ‘오션스 일레븐’의 스티브 소더버그 감독에 맷 데이먼, 케이트 윈슬렛 등 톱스타 군단의 영화다. 질병으로 인한 인류 대재난을 다뤄 세계적으로 흥행했다. 그는 전 세계 보건국 대표자들의 비디오 컨퍼런스에서 일본 대표자로 등장한다. 원래 대사는 6문장 이상이었지만 다 편집되고 ‘대책은 있습니까’ 한 마디만 살았다. 권 씨는 “일본계, 중국계 등 20명이 넘게 경쟁했다. 대기만 5~6시간, 촬영도 20번 이상 했다”면서 “그래도 엑스트라와는 달리 소파와 화장실이 달린 트레일러가 제공됐다”고 말했다. FOX에서 시카고의 범죄와 경찰을 다룬 ‘시카고 코드’에서는 주류상을 운영하는 아시안 주인을 맡았다. 가게에 도둑이 들어 경찰이 체포하러 오는 장면에 등장해 주인공과의 대화도 있었다. “그 장면도 20번 이상 촬영한 것 같다. 주인공이 대사를 틀려 애드립을 했는데 편집됐더라.” ◇“은퇴? 절대 사양. 건강한 이상 쭉” 한국어 무대에선 비중 있는 배역감인 그가 대사 1~2개 단역에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하다. “오디션을 하고 촬영장을 가는 그 자체가 재미 있다. 떨어지면 속상하기도 하지만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 없다. 할리우드서 아시안 배역이 필요한 곳은 가뭄에 콩 나듯이다. 하지만 어딘간 필요할 것이고 목숨 걸고 할 필요 없는 것 아닌가.” 영어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큰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 그는 “길면 힘들지만 외울만하다. 한국어로 대사하던 것을 영어로 바꾼다고 생각한다”면서 “직업상 영어를 쓰고 살았다. 미국서 태어난 것처럼 완벽하진 않겠지만 의사소통에 지장은 없다”고 말했다. 올해 65세, 두 아이의 아버지이자 한 업체의 대표. 권 씨의 연기인생은 이제 시작이다. 그는 “신문에 85세 백인 노인이 아직도 단역 오디션을 보러다난다는 기사를 읽었다. 나도 그렇다”면서 “You Never Know”라고 하지 않는가. 자리를 펴놓고 있으면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 내년에는 더 많이 들어올 것이다. 건강하고 일이 있는 한 언제나 즐겁게 할 것이다”고 말했다. 그에게 있어 나이는 단순한 숫자에 불과하고 꿈을 갖고 있는 한 그의 삶은 ‘청춘’이다. 김주현 기자 kjoohyun@joongang.co.kr

2012-01-01

[나는 청춘이다] '피자 카페' 운영 지미 강씨

딥디쉬 피자로 유명한 시카고 친구들 "안된다" 말렸지만 최고 커피·피자 궁합 맞춰 베네스 메뉴 지역언론 호평 카페 스타일 운영도 큰 도움 한식 가미 퓨전음식도 도전 딥디쉬 피자로 유명한 시카고에서 뉴욕 스타일 피자로 승부한다? 친구들에게 이런 사업 아이디어를 말했을 때 ‘배신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아무리 뉴욕 스타일의 피자가 전국적으로는 유명하다 하더라도 딥디쉬와 시카고 스타일 핫도그인 폴리시 소시지가 뉴욕 스타일의 피자와 핫도그보다는 맛있다라는 인식이 강한 시카고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미 강은 시카고의 이런 상황을 역이용해 틈새시장 개척을 노렸다. 그리고 피자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착안한 것이 많은 시카고언들로부터 최고의 커피라는 평가를 받는 인텔리젠시아(Intelligentsia) 커피를 피자와 함께 판매하는 것이었다. 인텔리젠시아 커피가 원가는 다른 브랜드에 비해 비싸지만 주문 후 원두를 간 뒤에 판매하기 때문에 신선도 면에서 우수했다. 이 커피는 로컬지역에서 스타벅스나 카리부커피보다 좋은 평가를 받고 있어 고객들로부터 반응이 좋았다. 강 대표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피자와 커피에 어울리게 뉴올리언스 스타일의 베네스(beignets)까지 메뉴에 추가했다. 이 베네스가 피자 카페의 형식과 함께 지역 언론들로부터 큰 관심을 끌었다. ‘시카고 매거진’, ‘타임 아웃 시카고’ 등의 매체에서 모두 이 메뉴에 대한 호평을 다뤘다. 자신의 이름을 딴 지미스 피자 카페(Jimmy's Pizza Cafe)는 이렇게 해서 문을 열었다. 시카고 북부의 한인타운 인근에 위치한 피자 카페는 5개월 전에 오픈했다. 현재까지 출발은 좋다. ‘시카고 매거진’에서 피자 카페를 맛집으로 선정된 후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타지역에서 온 고객들은 시카고 스타일의 딥디쉬 피자에 대한 반감이 있었는지 얇은 피자를 선호했다. 무엇보다 시카고에서는 맛보기 힘든 뉴욕 스타일의 피자와 시카고의 커피, 뉴올리언스의 베네스라는 조화가 어필했다. 물론 피자 도우와 롤 등 모든 음식은 업소에서 직접 만들고 자동화된 오븐을 사용해 맛을 똑같이 유지하는 등의 노력이 작용했다. 카페 형식의 업소 운영도 큰 도움이 됐다. 오전에는 주로 출근길의 통근자들이 커피와 베네스, 롤 등의 아침식사를 주로 찾고 점심과 저녁에는 피자를 투-고 하는 고객이 많았다. 고객은 90%가 백인이고 광고를 많이 하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입소문을 타고 찾아오는 손님도 많다. 피자 중에서 가장 인기있는 메뉴는 마늘이 들어간 화이트피자. 주로 버지니아 등지의 동부지역에서만 판매되는 이 피자가 시카고에서 소개되자 백인 고객들이 열광했다. 강 대표는 현재 김치가 들어간 피자와 한국식 고구마 피자 등을 다음 메뉴로 생각하고 있다. 음식전문 웹사이트에서 이와 관련한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있다. 무모한 짓이라며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던 사람들도 이제 피자 카페를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다. 강 대표는 “카페가 성공하면 다른 지역에도 분점을 내고 싶다. 일단은 피자 하나로 명성을 쌓은 이후 한식을 가미한 퓨전음식에도 도전해 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요리학교를 나온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식당 사업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공부한 것도 아닌데 강 대표는 자신에 차 있다. 26세라는 젊음이 가장 큰 자신감이기도 하다. “시카고 지역에서도 최근 자기 식당을 열거나 유명 식당에서 주방장으로 일하는 한인 2세들이 많다. 그만큼 젊은 세대들에게 주방장과 요식업소는 매력적인 직장이다”라고 말하는 강 대표는 “앞으로 나와 같은 한인2세들이 더 많이 나올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전문직으로만 진출하려고 하는 젊은 한인들에게 더욱 많은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춘호 기자 polipch@koreadaily.com ☞시카고 스타일 피자란=시카고 딥 디쉬(deep dish)피자는 얇고 크리스피한 뉴욕 피자에 비해 훨씬 두껍고 푸짐하다. 먹는 방법도 뉴욕 피자는 손가락을 쓰면 되지만 딥 디쉬 피자는 나이크와 포크가 필수다. 1943년 우노 피자에서 처음 시작됐다고 알려졌다. 이탈리안 피자와 다른 점은 다양한 토핑을 사용하지 않은 채 많은 양의 치즈와 소스, 올리브 오일과 옥수수가루를 사용해 빵껍질이 최대 3인치까지 두껍다는 점이다. 딥 디쉬를 파는 피자 체인으로는 ‘Pizzeria Uno’, ‘Original Gino's Pizza’, ‘Gino's East’, ‘Lou Malnati's’ 등이 있다. 일부 업소에서는 일부분만 구운 피자를 전국으로 배달하기도 한다.

2012-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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